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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2일 (일)

[책소개] 현산어보를 찾아서

보트랑 조회 : 16,490

오래전에 나온 물건 중에 지금도 생생한 생명력을 가진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책에도 그런 것이 없지 않은데 정약전이 지은 ‘현산어보’가 그런 책에 속한다. 정약전은 1801년 아우 정약용과 함께 전라도에 유배당해 흑산도에 파묻혀 살다가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그는 좌절 속에서 섬마을 백성들과 어울려 지내며 어부들에게서 들은 바다 물고기에 관한 지식을 체계화하여 이 책을 썼다. 200여 년 전 한국의 어류를 생생하게 기록한, 조선시대 박물학의 대표적 성과로 인정받는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은 한문으로 쓰였고, 또 간결한 보고서 형식이기에 어류 전문가가 아니면 내용을 쉽게 알 수 없다.

고등학교 생물교사인 저자는 현산어보와 관련된 지역을 샅샅이 탐사하여 정약전이 조사해 놓은 물고기와 지금도 볼 수 있는 물고기를 대조하는 정밀한 작업을 통해 자연과학서 현산어보를 흥미진진한 인문서로 변신시켰다. 저자의 손끝에서 200년이란 시차를 넘어서 바다 생물의 생태가 흥미진진하고 신비로운 이야기로 재탄생했다.

정약전이 딱딱하게 설명해 놓은 물고기 낱낱에 대해 저자는 탐방과 추적, 유추와 확인의 과정을 거친다. 정약전의 물고기를 저자가 직접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독자를 유인한다. 책의 어느 곳을 펴든 물고기에 관한 흥미로운 지식의 세계가 펼쳐진다.

그 가운데 특히 청어가 잡히는 어획량에 일정한 주기가 있음을 발견한 정약전의 안목에 감탄하는 대목, 연안에 출몰하는 다양한 고래의 생태에 관한 설명, 홍어의 생태와 특별한 맛을 설명하며 ‘만만한 게 홍어 ×’라는 속담의 유래를 소개한 대목 등 유달리 흥미를 끄는 대목이 한둘이 아니다.

말미잘의 생태를 추적한 ‘말미잘 어원 추적기’ 대목도 압권이다. 현산어보에서 말미잘은 석항호(石肛호)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그 속명은 홍미주알(紅未周軋·붉은 미주알)이다. 정약전은 “모양은 오랫동안 이질을 앓은 사람이 탈항한 것 같고 빛깔은 검푸르다”고 설명했다. 말미잘의 생김새를 보고 사람의 항문을 연상한 것이다.

이 설명에 주목한 저자는 말미잘이 항문과 어떤 관계가 있다고 추정한다. 속명인 홍미주알은 항문을 이루는 창자의 끝 부분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탈항한 항문이라는 정약전의 연상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이름임을 밝혀낸다. 결국 말미잘의 미잘은 미주알을 줄인 말이요, 말미잘은 사람보다 훨씬 큰 항문을 가진 어류라는 의미임을 밝혀냈다.

현산어보는 한국 최초의 해양생물학 전문서로 모두 226개의 표제를 달고 물고기를 비롯하여 갯지렁이, 해삼, 갈매기, 물개, 고래, 미역 등 다양한 생물종을 조사했다. 당시 어부들의 생생한 관찰과 경험을 살리고 저자 자신의 체험과 해부를 통해 얻은 정확한 지식을 계보화한 저서다. 이태원 씨는 그러한 소중한 지적 유산을 생생하게 복원해 놓았다.

이 책은 현산어보에 관한 인문서다. 200년의 시차를 둔 두 명의 저자가 번갈아 가며 안내하는, 우리 해양생물 생태에 대한 훌륭한 안내서다. 낡은 고전에 새 옷을 입혀 이렇게 흥미로운 고전으로 복원하는 것은 전문적 지식과 열정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저자는 이 책을 7년여의 노력을 통해 완성했다고 한다.

안대회 명지대 교수 국문학ⓒ 동아일보 & 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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