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트를 타고 혼자서 남극으로 와 (퍼옴)
|
조회 : 18,470
글쓴이 : 모모
|
http://aceboating.com/gnu/cm_free/194 |
요트를 타고 혼자서 남극으로 와
작은 배인 요트를 타고 남극으로 온다는 것이 불가능하게 보이나 용기가 있는 사람들이 이따금 남극으로 온단다. 예를 들면 데이빗 류이스 (David Lewis 1919-)같은 사람이란다. 그는 남극을 몇 번이나 탐험했단다. 그 가운데 이번 호에서는 먼저 요트로 남극을 탐험했던 이야기를 들어보자. 역사상 처음이야 그는 혼자서 1972년 10월 19일 길이가 10 m인 "얼음새"라는 뜻의 강철요트 "아이스 버드 (Ice Bird)"호로 호주의 시드니를 떠났어. 목표가 거의 9,000 km 떨어진 남극반도에 있는 미국의 파머기지였단다. 얼음새는 남빙양에 사는 작고 푸르스름한 작은 물새의 일종이야. 새의 이름을 따 요트의 이름을 지었다는 것이 재미있어. 얼음 새처럼 남빙양을 잘 알고 남빙양에서 잘 간다는 뜻이겠지? 그가 어떻게 남극을 요트로 탐험할 생각을 했을까? 먼저 그는 1964년 당시 영국남극조사소의 소장이던 비비안 훅스 경 (Sir Vivian Fuchs 1908-2000)에게 요트로 남극을 탐험할 수 있는지를 물어보았단다. 그가 푹스 경의 조언과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어 요트로는 호주에서 가까운 남극대륙을 거의 탐험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어. 요트로 탐험할 수 있는 곳으로는 남극반도의 서쪽 해안 밖에 없단다. 그런 점에서 보면 호주는 요트탐험의 출발지점으로서는 적당하지 않았어. 그래도 그는 뉴질랜드 출신으로 호주를 출발지로 잡았단다. 그는 시드니를 떠나던 날 항해기록에 "남극반도를 향하여 포트 잭슨을 오후 1시에 떠나다"라고 적었단다. 또 그는 단순히 "남극반도를 향하여"라고 적어 반드시 "남극으로" 가는 것과는 달리, 그의 뜻을 이루지도 못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의 항해기에서 읽을 수 있어. 감히 요트를 가지고 "남극으로 가겠다"는 굳은 결심을 표명하기에는 남극이 너무 무서운 곳이라는 것을 바다를 아는 사람들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야. 포트 잭슨은 시드니의 입구에 있는 항구야. 당시 열한 살과 열 살 된 그의 두 딸들을 태운 배가 나와 그의 무사항해를 빌었어. 그 어린 아이들은 아빠가 얼마나 위험하고 무서운 항해를 하는 지 몰랐을 거야. 이미 1895년에 요트로 세계를 일주했으며 1970/71년에 여섯 사람이 길이 16 m의 요트 "아와니 (Awahnee)" 호로 남위 60도를 따라 남극대륙을 일주한 적은 있었단다. 당시 이태리의 16 m 되는 요트 "산 쥬세페 듀 (San Giuseppe Due)" 호도 남극반도에 왔었어. 그러나 지금까지 혼자서 요트로 남극에 가겠다고 나섰던 사람은 없었단다. 뒤집어지면 저절로 일어나는 오뚜기 요트 시드니를 떠난 지 13 일 만에 그는 뉴질랜드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도시인 스튜어트 섬의 오반에 도착했어. 그 날 저녁 연한 초록색으로 빛나는 오로라가 밤하늘을 덮었단다. 오로라는 아름다웠으나 그 날밤이 유난히 추웠단다. 그 곳은 뉴질랜드의 가장 남쪽이라 외로움도 느껴 그가 그 오로라를 아름답다고 느끼기보다는 앞으로 남극에서 일어날 위험에 대한 경고로 생각했을 정도로 그는 그의 앞길을 염려했어. 그는 물과 연료를 채운 뒤 11월 2일 오반 항구를 나섰단다. 그의 요트는 주로 바람으로 가지만 혹시 돛이 망가진다거나 할 때에는 엔진으로 가기 위해 기름을 준비했던 거야. 프로펠러는 요트의 아래쪽에 있어 웬만한 얼음에는 견디게끔 만들어져 있었어. 게다가 그의 요트는 뒤집어지는 즉시 바로 서게끔 2.5 톤의 납으로 만든 용골이 배의 아래쪽에 붙어 있었단다. 마치 오뚜기가 쓰러지자마자 일어나는 것과 같은 원리로 된 일종의 안전장치였어. 남극이 무서운 곳이기에 이런 안전장치가 필요한 거야. "마치 야생동물 보호지역에 들어 온 기분" 그는 남위 60도까지는 남동쪽으로 항해하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단다. 일단 남극에 들어 온 다음부터는 남위 60도를 따라 정동쪽으로 6,000 km를 가면 목표 부근이야. 남위 60도는 적어도 해도대로 하면 편서풍과 해류가 동쪽으로 불고 흐르는 것으로 되어 있어서 항해에는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단다. 서경 65도 정도에서 정남쪽으로 내려가면 남극반도의 서쪽에 있는 섬들을 만날 수 있어. 그는 남위 50도를 넘어선 11월 5일 "마치 야생동물 보호지역에 들어 온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고 항해일지에 적은 것으로 보아, 그의 요트가 남빙양의 파도에 상당히 흔들렸던 것으로 보여. 사실 뱃사람들이 옛날부터 "부르짖는 40도-노호하는 50도"라고 해서 남빙양의 험한 바다를 표현했어. 드디어 그가 날짜변경선을 지나 갈 때인 11일 남빙양의 위력을 실감했단다. 커다란 파도가 바람에 부서져 날리는 연기 같은 물보라를 뿌리며 일정한 간격으로 그의 작은 요트를 당장 때려부술 듯이 두드려 대었어. 그는 항해일지에 "바람에 날리는 눈으로 보아 ...우리가 어딘가에 오고있다. 마음놓자"라고 적어 무서운 그의 심정을 억지로 위로했다는 기분이 들어. 남위 60도를 따라 동쪽으로 가 드디어 그의 요트가 남위 60도를 넘어섰을 때인 11월 중순 그가 뱃머리를 동쪽으로 돌렸단다. 이제 곧장 동쪽으로 6,000 km 정도를 가면 그는 남극반도의 북쪽 바다로 가게 된단다. 그 때쯤에는 추워서 그가 요트의 실내에서도 털옷을 세 벌씩이나 끼어 입었고 비행복과 파카를 입었단다. 물론 밖에 나갈 때에는 그 위에 방수복을 입고 그의 몸을 요트에 묶어놓아 생명을 지켜 줄 가장 중요한 안전 줄을 반드시 몸에 묶고 나갔어. 그는 11월 16일 "폭풍이 또 분다. 꼭대기에 물거품이 이는 파도사이로 눈이 날리는 것을 본다는 것이 너무나 무시무시하다. 안테나, 줄, 돛대에는 얼음이 얼어붙었고 플라스틱 도움은 눈으로 두껍게 덮였다. 한 떼의 작은 얼음 새가 배의 꼬리 주위에서 눈송이 같이 힘없이 유령처럼 날고 있다"라고 항해일지에 적었어. 그가 따라가는 남위 60도는 남극수렴선 주위로 날씨가 유난히 나쁘고 안개가 계속되고 눈이 언제나 소나기처럼 오는 지역이었단다. 물탱크의 물이 얼어붙어 그는 캔에 든 물을 마셔야 했어. 바닷물과 눈이 선실로 파고 들어와 모든 것이 축축해졌어. 그래도 그는 선실에서 햄과 파인애플과 달걀을 조리해 먹고 커피를 마셨어. 밖에서야 요트를 통째로 삼킬 정도의 파도가 일고 눈이 날려도 선실만큼은 축축해도 따뜻해 사람이 사는 곳이었단다. 11월 26일 저녁 "지금까지의 폭풍 가운데 가장 큰 폭풍이 불고 있다. 시속 50 노트의 북서풍으로 거대한 파도가 일고 파도의 마루에서는 물보라가 날린다. 파도가 '아이스 버드' 호를 때릴 때마다 선실에 있는 묶어 놓지 않은 모든 것이 날아다닌다. 창문을 보호하는 철판이 언제나 고맙다...배의 꼬리 쪽을 보면 배가 솟아날 것 같지 않은데 쉽게 솟아난다"라고 항해일지에 적어 남빙양의 파도에 따라 뒤범벅이 되는 선실과 배의 움직임을 기록했어. 처음으로 뒤집어져 11월 29일 남위 60도 서경 135도에서 그가 가장 무서워했던 일이 일어났단다. 즉 그의 요트가 뒤집어 졌던 거야. 파도가 세어진다는 불길한 징조로 물컵이 뒤집어지고 기압계가 흔들리면서 바늘이 빠져 나왔어. 게다가 다음 순간부터는 태풍만큼 강력한 폭풍이 새로이 불기 시작했던 거야. 그 곳이 상상할 수 없는 높이 30 m의 파도가 일어났던 곳이었어. 태평양에서 바람으로 일어났던 가장 큰 파도의 높이가 34.1 m였다고 하지만 남빙양의 파도도 그에 못지 않단다. 만약 그 파도높이의 반 만한 파도가 그 요트 위에서 무너진다면 그 요트가 아무리 강철로 만들어져도 납작하게 부서질 것이 거의 확실했단다. 당시 파도의 위력은 그가 북대서양에서 경험한 적이 없는 커다란 파도였어. 저녁때 바람은 초속 30 m 정도로 강해졌고 12 m로 높아진 파도가 점점 높아져 갔단다. "아이스 버드"호는 악천후에 쓰는 두꺼운 돛 베로 만든 삼각형의 폭풍 돛을 낮게 세우고 항해했단다. 흔들리면서 가던 중 갑자기 요트의 꼬리가 들리며 키를 잡는 줄을 아무리 미친 듯이 당겨도 요트는 것 잡을 수 없이 돌아갔어. 사람의 힘으로는 안 된다는 뜻이겠지? 이어서 거대한 파도가 요트를 강타해 요트는 힘없이 옆으로 뒤집어졌던 거야. 선반이 떨어져 나오고 물건들이 부딪히면서 쏟아졌어. 성한 물건이 하나도 없어 물론 요트가 뒤집어진 다음 순간에 무거운 납으로 만든 용골 덕분에 자동으로 똑바로 섰어. 그러나 요트가 뒤집어지면서 모든 것이 바뀌어졌어. 조금 전까지 자랑스럽던 요트가 난파선이 된 거야. 무엇 한 가지 제자리에 있는 것이 없었어. 그 가운데서도 그의 항해일지와 해도가 물에 잠긴 것이 큰 문제였어. 그는 정신을 차리자 무엇보다도 그것을 먼저 집어 올렸단다. 만약 해도가 젖어 못 쓰게 되면 류이스가 살아남는 것을 걱정해야 될 거야. 앞쪽의 출입문이 비틀어져 열렸으며 문의 경첩도 떨어질 정도가 되었어. 그가 갑판에서 쓰는 활차로 그 문을 힘껏 당겨서 닫을 수 있는 한 최대로 닫았단다. 선실의 오른쪽 2.4 m 정도가 망치에 맞은 듯이 우글쭈글해지고 15 cm는 찢어져 요트가 기울어 질 때마다 바닷물이 흘러들어 왔어. 류이스는 두께 3 mm의 강철로 만든 그의 요트가 이렇게 찌그러지리라고는 예상을 하지 못했단다. 자동으로 방향을 잡는 귀중한 장치가 부서져 없어졌고 그 부속인 기어장치가 망가졌어. 그 때 삼각 돛도 찢어진 것 같아. 그는 그 폭풍 속에서 앞 갑판으로 기어나가 소금물을 뒤집어쓰고 눈이 쓰려 반쯤은 장님이 된 채 돛을 내리고 간신히 선실로 들어 왔단다. 배의 시설이나 장비 가운데 성한 것이 하나 없었으나 그리니치 표준시간을 가리키는 그의 손목시계가 다행히 가고 있었어. 무전기가 벌써 망가져 외부세계로는 연락을 할 수 없었단다. 그는 시계로 경도를 아는 수밖에 없었어. 즉 경도가 한 시간마다 15 도의 차이가 생기므로 시간을 보아서 경도를 대강 알자는 생각이었던 거야. 구명정이 없어져 그는 장갑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단다. 그 때 그는 요트가 침몰하면 장갑이 필요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 불안해지면서 바로 불길한 생각을 했던 거야. 그는 정신을 차리고 버킷으로 물을 퍼내기 시작했어. 펌프가 고장나서 쓸 수 없었단다. 그는 여섯 시간 동안 서른 다섯 버킷의 물을 퍼 내 선실바닥이 들어 날 즈음에 다시 한 번 커다란 파도가 요트를 때려 다시 물바다가 되었단다. 그가 다시 물을 퍼내기 시작할 때 구명정이 없어진 사실을 알았단다. 떠나기 전에 구명정을 잘 묶는다고 묶었겠지만 남빙양의 파도에는 대단한 것이 되지 못해 매어 놓았던 줄이 끊어져 떨어졌던 거란다. 그럴 일이야 없다고 믿어지지만 만약 요트가 더 쓰지 못할 정도로 부서진다면 구명정이 그의 생명을 구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장비였어. 그것이 없어졌다는 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요트를 쓸 수 있게 해야된다는 뜻이었단다. 그는 살겠다는 한 가지 생각만으로 바닥의 물을 기계같이 퍼내었단다. 두 번 째 들어온 물은 열여덟 버킷밖에 되지 않았어. "...만사를 제쳐두고 쉬어야겠다 ..." 드디어 폭풍도 사라지고 해가 나타났어. 정오에 그가 연필을 들고 축축한 항해일지에 "상당한 바람, 풍력 9-10, 험한 파도를 정면에서 만나다. 모든 것이 젖고 파손되다. 만사를 제쳐 두고 쉬어야겠다"라고 적었단다. 그가 얼마나 힘이 들었고 피곤한 지를 알 수 있지? 풍력 9-10은 큰 파도가 더 높아지고 바람에 날리는 물보라 때문에 해면이 하얗게 되고 앞이 보이지 않는 바다란다. 파도의 높이는 5 m에서 9 m 정도야. 그러나 그는 당장 돛대가 쓰러지면서 파손된 선체를 고쳐야 되었어. 그는 그 일을 하면서 두 손이 동상에 걸리는 지도 몰랐단다. 다음 날 아침 손가락이 마비되어 시계의 태엽을 감을 수 없었을 때야 비로소 그의 두 손이 동상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그 날 그는 저녁도 못 해먹고 추위에 떨고 졸면서 밤을 보냈단다. 당시 그는 그의 일기에 "기운이 날 상황이 아니다. '아이스 버드' 호는 돛대를 부러뜨린 채 남위 60도의 거친 바다에서 손쓸 수 없게 버둥거린다. 흔들릴 때마다 찢어진 지붕에서는 물이 흘러 들어온다. 엔진이 꺼졌고 자동기어가 망가졌으며 무전기가 물에 잠겼고 난로가 부서졌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36 피트의 돛대를 잃어버리고 동상에 걸린 내 두 손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라고 써 배도 큰 타격을 받았지만 동상에 걸린 두 손도 일을 하기에는 상당히 무리였다는 것을 알 수 있어. 그렇지? "'아이스 버드' 호와 내가 혼자서 눈보라가 몰아치는 빙벽과 암벽의 남극으로 갈려고 호주의 시드니를 떠난 지 6 주만에 6,660 km를 왔다. 지금 요트가 목적지에서 아직도 4,000 km 떨어진 곳에서 미쳐 날뛰는 폭풍 속에서 완전히 굴러 중상을 입어 누워있다. 뒤죽박죽이 된 선실에 맥없이 앉아 남빙양의 이 황량한 곳까지 나를 몰고 온 그 압도할 수 없는 강한 충동과 죽음이 확실히 어떨 가를 곰곰이 생각했다."라고 적은 것으로 보아 요트도 크게 망가졌으나 그의 마음의 상태도 상당히 어려웠다고 생각돼. 자기가 죽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나 딸들이 불쌍해 12월 1일 그는 털장갑을 끼고 눈이 휘날리는 속에서 부서진 물체들을 다 치웠으며 돛을 하나 만들어 세울 생각을 했어. 소금물이 들어간 엔진이 고장났기 때문에 요트를 움직일 힘은 바람밖에 없었기 때문이란다. 그는 다행히 여분으로 가지고 있던 난로에 방수성냥으로 불을 붙여 음식물을 만들고 커피를 끓일 수 있었어. 그는 커피를 홀짝거리면서 "이것이야말로 진짜 크리스마스구나"라고 생각했단다. 다음 날 다행히 바람이 자 그가 3 m 짜리 돛대를 세우고 2번 삼각 돛을 달았단다. 바람이 뒤에서만 불지 않으면 키의 조종이 가능해 그는 선실에 앉아 배의 키를 조종했단다. 한편 그는 동상에 걸린 손이 더 나빠질 까봐 약을 먹었어. 동상은 사소하게 보여도 심하면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잘라야 되는 수도 있단다. "아이스 버드" 호는 험한 바다를 헤치면서 계속해서 동쪽으로 천천히 떠가면서 돛이 자꾸 찢어졌단다. 그때 그는 죽음이 그렇게 대단히 중요하지는 않아 자신이 죽어도 괜찮으나 단지 두 딸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없어진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죽음이 먼 곳에 있지 않다고 생각하니 자식들이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나봐. 12월 9일 그는 자신이 힘들게 살고 있다는 생각에 "내가 매일 내 인생회원권을 구해야만 한다"라고 썼단다. 인생회원권을 사지 못 하면 죽는다는 뜻이겠지? 그는 밤사이에 흘러 들어 온 물 스물네 버킷을 퍼내고 눈을 치웠어. 그러면서도 그는 이상하게도 자신이 외롭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단다. 또 뒤집어져 그가 만들어 세운 돛대는 12월 12일 밤에도 10 cm 정도 부러져 그가 다음날 아침에 다시 눈 속에서 돛을 낮추어 달았단다. 오후에 들어서자 바다가 다시 사나워지기 시작했어. 그 날 남위 60도 서경 120도 정도에 왔을 때 그의 요트는 두 번째 뒤집어 졌단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번의 경험을 살려 준비를 잘 해서 큰 피해가 없었어. 예를 들면 비스킷은 벽에 붙여 놓았고 침낭은 물에 떴으며 해도와 항해일기는 플라스틱주머니에 넣어 젖지 않았으며 책상도 단단하게 묶어 놓아 움직이지 않았단다. 환풍기를 천 조각으로 막아 놓아 물도 많이 들어오지 않아 스물 한 버킷 밖에 되지 않았어. 그는 12월 14일 항해일지에 "폴리네시아 사람들의 천문기술에 관한 내 논문이 런던에 있는 영국 학사원에서 오늘 발표된다!...밤이 차고 침낭이 축축한 게 아니라 완전히 물에 젖었고 의욕도 대단히 떨어졌고...나아지지도 않는다. 거의 절망이다"라고 적어 자신의 연구업적이 발표되는 데 대한 기쁨도 있었지만 요트 속의 생활에는 상당한 실망했단다. 튼튼한 돛대를 세워 그는 다음날 도르래의 받침목으로 썼던 3.5 m 가까운 튼튼한 나무로 돛대를 세울 생각을 했단다. 그는 혼자서는 다루기 힘든 그 나무를 맞추고 깎고 고정하고 당기고해서 하루 종일 고생해 돛대를 세웠어. 그는 아침 여덟 시부터 오후 네 시 반까지 흔들리는 요트 위에서 꼬박 그 일에 매달렸단다. 돛대를 세운 날 밤에는 기뻐서 독한 술과 우유를 마시며 혼자 자축했어. 아마도 그 때 그는 자신이 폭풍에게 이길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던 것으로 보여. 그렇지? 그는 1972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특식으로 먹었던 부스러진 비스킷을 얼음새들에게 던져 주었어. 반드시 그래서는 아니겠지만 열흘만에 날씨가 맑아 처음으로 정확하게 그의 위치를 알아내었단다. 그가 속으로 그 상태로 달리고 돛대가 쓰러지지 않는다면 바다가 얼기 전에 목적지에 닿으리라고 생각했어. 1973년 새해 들어서 만난 크기가 10 m 정도의 흑고래 두 마리가 "아이스 버드" 호를 9 일 동안이나 따라 왔단다. 고래들은 요트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요트와 놀면서 왔어. 이런 것을 보면 고래도 상당히 영리한 동물이지? 고래가 떠나가면서 요트를 따라 오던 얼음새들도 떠나갔어. 드디어 육지가 보여 그 때쯤 그는 남극반도의 북쪽에 와 정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단다. 그러나 날씨가 다시 나빠져 진눈깨비가 날리기 시작했어. 저녁때까지 요트 위에는 눈이 널판자처럼 붙었단다. 뱃전에서는 물이 튀고 바람소리는 귀가 먹을 정도였어. 그는 손도 아팠고 얼음을 보고 피할 수도 없어 차가운 침낭 속으로 파고 들어갔단다. 그 때 그는 탐험을 시작한 지 처음으로 폭풍 속에서도 단잠을 잤어. 아마도 몸이 대단히 피곤해졌고 긴장이 풀린 것으로 생각돼. 다음 날인 1월 26일 폭풍은 사라졌고 구름사이로 앤버스 섬의 눈으로 덮인 거대한 산과 검은 절벽이 보였단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거의 세 달만에 산을 처음 본 그가 어떤 승리감 같은 것을 느끼지 못했어. 오후가 되어서야 그가 주위의 아름다운 빙벽과 빙하를 보면서 그들이 아름답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어. 실제 약 100 km의 빙벽과 암벽이 서있고 가운데에 흰눈과 얼음으로 덮인 2,800 m가 넘는 높은 산을 볼 때 모두가 그 아름다움과 위용에 압도당한단다. 그가 목표로 한 앤버스 섬의 제일 높은 봉우리 프랑새 산이 2,800 m가 넘는단다. 2,800 미터가 그렇게 높다고 생각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바다에서 한 눈에 그 산을 보면 대단히 높다는 생각이 들어. 실제 우리가 어떤 산을 볼 때에는 상당히 높은 곳에서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높게 보이지 않아. 백두산보다 더 높은 산을 바다표면에서 산꼭대기까지 한눈에 보면 정말 높다는 생각이 들어. 류이스도 마찬가지였단다. 드디어 미국 파머기지에 도착해 27일 새벽 그는 드디어 미국 파머기지의 불빛을 보고 감전된 것처럼 놀라 불꽃신호를 하나 쏘아 올렸으나 미국기지에서는 보지 못했는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어. 곧 다시 바람이 일어 그는 조심했단다. 육지로 가까이 오면서는 바위들이 있어 유난히 조심해야 되기 때문이야. 만약 바위에 부딪히면 끝장이야. 다음 날 아침 바람이 잤으나 갑자기 요트가 너울에 흔들리면서 위험한 순간이 다시 한 번 왔단다. 그 때쯤 요트가 바위투성이의 얕은 곳에 와 있어서 정말 위험했어. 요트가 세 번씩이나 솟아오를 때 류이스는 긴장이 되어 방향조종용 줄만 잡았어. 만약 그 때 잘못해서 요트의 용골이나 선체가 바위에 부딪히면 탐험도 끝나고 생명마저 위험하게 되기 때문이야. 류이스는 당시의 순간을 생각하면서 "밝아 오르는 새벽 해의 햇빛 덕분으로 섬을 돌아, 뉴질랜드를 떠난 이후 처음으로 섬으로 둘러싸인 물 속으로 들어 갈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몸이 떨린다"라고 말했단다. 이런 것을 보아서 굉장히 위험했으나 한편 처음으로 안전한 곳으로 가면서 감격도 했던 것 같단다. 그렇지? 그 때가 1월 29일 새벽 2시 반이었단다. 그의 작은 요트 "아이스 버드" 호가 시드니에서 9,650 km를 왔고 돛대가 부서진 다음에도 4,000 km를 와 하루에 67 km를 왔단다. 돛대가 없어도 이 정도를 왔으니 대단히 빨리 온 거야. 그렇지? 당시 그가 파머기지에 도착했을 때 프랑스의 해양학자이자 탐험가인 꾸스또 (J. Y. Cousteau) 할아버지의 배 "칼립소" 호가 들어와 있었단다. 그가 그 옆에 닻을 떨어뜨리고 사람을 찾자 문이 열리면서 놀란 얼굴이 나왔단다. 드디어 처음으로 요트로 혼자서 남빙양을 돌아와 사람을 만나는 순간이었단다. 문을 열고 나온 사람도 요트가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거야. 얼음에 갇혀 나흘을 보내 데이빗 류이스가 파머기지에 한 달 정도 머물면서 요트를 들어 올려놓고 수리했단다. 그는 미국 남극 연구선을 타고 남미로 나와 뉴질랜드로 돌아갔다가, 그 해 11월 영국 물자 운반선을 타고 다시 파머기지로 돌아왔어. 그는 한 달 정도 요트를 더 수리한 후 12월 12일 부근의 남쪽에 있는 영국의 파라데이 기지로 떠났어. 영국기지에 거의 다 와서 다시 얼음에 갇혀 그는 나흘을 보냈단다. 그 동안 그는 얼음에서 벗어 나려고 막대기로 얼음을 밀고 당기는 싸움을 한 끝에 겨우 빠져 나왔어. 그는 부근에 있는 아르헨티나 기지와 영국기지를 찾아 본 다음에 사우스 오크니 군도의 남위 60도 43분 서경 45도 36분에 있는 영국의 시그니 기지에 들렀다가 1974년 1월 8일 그 기지를 떠났단다. 그러나 그는 빙산들이 모인 바다를 만나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어. 그는 돛을 내리고 빙산들이 흘러가기만을 기다렸단다. 안개도 심했고 눈마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내려 밤새 고생했어. 게다가 새로이 고친 자동방향타가 얼음에 부딪혀 완전히 망가졌단다. "3 주 후에 빙산이 없는 바다에 도착해 앞길은 괜찮아 보였다. 2월 24일 태풍급의 폭풍을 만나 '아이스 버드' 호가 뒤집어지면서 미국기지에서 세운 돛대가 부러졌다. 3 주 후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 타운에 들어왔다. 여기에서 나의 여행은 끝났다"라고 적어 드디어 길고도 무서웠던 단독 남극 요트탐험을 무사히 끝내었단다 |